12월의 독립운동가 현정건(玄鼎健)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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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소리

12월의 독립운동가 현정건(玄鼎健)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2월의 독립운동가'로 민족 유일당 운동을 전개한 현정건 선생을 선정했다.

1893년 6월 29일 대구에서 태어난 선생은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서, 1919년 9월 17일 보선되어 임시정부의 국사처리를 위하여 활동했다.

1920년에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23년 6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될 때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일원으로 윤해(尹海) ? 신숙(申肅) 등이 주동이 된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활동했다.

그어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조선공화국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이에 뜻을 바꾸어 이러한 일은 전 민족의 의사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 가담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면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을 우선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인 1924년 6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오는 국내 학생들이 중국의 언어와 풍속에 익숙하지 못하여 중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상급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는 실정에 놓이자, 김규식(金奎植)의 제안으로 후학양성을 위해 인성학교 내에 예비강습소를 개설했다.

김규식 ? 여운형과 함께 영어 과목을 담당하여 교수하였다. 그 후 상해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자 여운형 ? 김종상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했다.

동년 11월에는 윤자영이 조직한 상해청년동맹회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25년 9월 8일 중국 상해교민단의사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29년 10월 10일 중국사정연구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11월 상해에서 의열단 창립 제9주년을 맞이하여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는 등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1일 상해에서 독립전선의 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해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고, 동년 10월에는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연합회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8년 봄, 상해 프랑스 조계 패륵로 항경리에서 상해 일본 주재 총영사관 경찰에게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동년 12월 12일, 소위 치안유지법,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 만기 출옥하였으나 출옥 후 6개월 20일만인 1932년 12월 30일, 옥고 여독과 고문 후유증에 의한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0세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순천보훈지청 = 허대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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