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그림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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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여성

나비그림에 쓰다

허영숙 시인

  • 기자
  • 등록 2015.12.22 10:56
  • 조회수 1,414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돋아
꽃 안의 일도 꽃 밖의 일도 두근거리는 중심이 되었다
꽃술과 교감했으므로 날개 접고 앉은 자리가 모두 꽃자리였다

꽃길을 날아다녔으나 꽃술을 품었다고
흉금에 다 아름다운 분粉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겹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꽃독에
날개를 다치고 먼 남쪽 다산에 와서 앉는다
낮달이 다붓하게 따라온다
주전자에는 찻물이 끓고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는 말아라*
오래 전 날개를 다치고 이곳에 먼저 와서 앉았던 사람이
더운 붓끝으로 허공에 쓰고 있다

*정약용의 시 “題?蝶圖” 에서 인용


*허영숙 시인의 약력
2006년 《시안》신인상 당선. <시마을> 동인. 시집『바코드』. 공저시집『느티나무의 엽서를 받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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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나비의 형상이나 안개의 형상을 대조해보면 이런 글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진의 <산속 집에서 우연히 짓다>라는 한시인데 마지막 글귀에 “밤 지새운 묵은 안개 깊은 숲에 남았다가 낮 바람 불어오자 부슬부슬 비 뿌리네” 하는 글귀와 허영숙 시인의 마지막 행 두 줄 “오래 전 날개를 다치고 이곳에 먼저 와서 앉았던 사람이 더운 붓끝으로 허공에 쓰고 있다”가 꼭 그렇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상상에 노를 저었을 때 보는 사람마다의 관점이 다르겠지만 유추해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시인의 심상이 본래 따뜻해서인지 글에서 녹아내리는 꽃도 그윽한 운치와 서늘한 향기마저 난다.
 
  당시 다산의 시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대변이랄까. 누구의 의견을 빌어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나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것이나 이런 것들이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라는 것이다. 참신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결코 추하지 않는 나비와 꽃을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가는 힘이 있어 보인다.

<-서문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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