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경주 시인 약력 1976년 전남 광주...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
아파트 화단에 앉아 꽃씨를 심는다 다섯 살배기 흙손가락에서 피어나는 봄흙의 귓불에선 아직도 말간 배냄새가 난다 나도 씨였죠? 이 씨도 쑥쑥 자랄 거죠? 한껏 치켜올린 입술이 나팔꽃처럼 둥글게 피어나고 꽃씨를 품은 봄흙을 다독이는 살빛 떡잎이 둘 타클라마칸 고비의 황사를 견디며 지구의 저 저 저 모퉁이를 견디며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나이테처럼 쑥쑥 높아지는 키의 눈금들이 해님에게 가는 계단이래! 꽃씨를 묻은 플라스틱 화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위태로운 흙물 엉덩이를 보며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 가도 퍼 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 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 준다.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일어서서 껄껄 웃으며무등산을 보며 ...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
달팽이 개수대를 기어 오른다제 살 곳에 살지 못하는 것이 저 달팽이 뿐이랴만언제 이 사막을 건널 것인가연유를 묻지 않아도 여기, 지금 이곳응, 나야 하고 말 걸어 볼 사람 하나 없는 건기의 도시때때로 절박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직도그곳엔 바람을 되새김질하는 감자꽃과해질녘 주인이 전지한 넝쿨에 참외꽃 피겠지만겹겹의 바람을 쟁이는 치마상추 잎 그늘에깃들고 싶었을 달팽이를 안다 오늘도 도시는 번화하고 바람이 불었다모두들 촛불 켜들고 광장으로 나갈 때에도달팽이 건기의 도시를 횡단하며 자정 가깝도록 서걱서걱 초인종을 눌렀다, 그때마다내 ...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돋아 꽃 안의 일도 꽃 밖의 일도 두근거리는 중심이 되었다 꽃술과 교감했으므로 날개 접고 앉은 자리가 모두 꽃자리였다 꽃길을 날아다녔으나 꽃술을 품었다고 흉금에 다 아름다운 분粉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겹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꽃독에 날개를 다치고 먼 남쪽 다산에 와서 앉는다 낮달이 다붓하게 따라온다 주전자에는 찻물이 끓고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는 말아라* 오래 ...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하고 지난 설에도 안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그러냐 안.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 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
노점상 여자가 와르르 얼음포대를 쏟는다갈치 고등어 상자에 수북한 얼음의 각이 날카롭다 아가미가 싱싱한 얼음들, 하지만 파장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라지는 얼음의 몸, 한낮의 열기에 조금씩 각이 뭉툭해진다 질척해진 물의 눈동자들 길바닥으로 쏟아지는 땡볕에 고등어 눈동자도 함께 풀린다 얼음은 얼음끼리 뭉쳐야 사는 법 얼음공장에서 냉기로 꽁꽁 다진 물의 결심이 풀리는 시간, 한 몸으로 들러붙자는 약속마저 몽롱하다 서서히 조직이 와해되고 체념이 늘어난다핏물처럼 고이는 물의 사체들 달려드는 파리 떼에 모기향이 향불처럼 타오르고 노점상은 파리...
하늘 이리 맑은 날은 무슨 소식이 올 것 같아강둑의 젖은 억새도 머리 낭창 세우고햇살에 씻긴 강물은 가르마가 하얗다 바람결에 부쳐온 난독의 문장 한 줄먼 그대 외진 마음 다 읽을 수 없어서 수척한 가을 전언만 홀로 받아 적는다 은빛 날개를 접고 수면을 오래 보는중백로 긴 목덜미가 전생처럼 서러운 날 여기에 없는 당신을 가만 불러 보듬는다 *강정숙 시인 약력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수상. 2009년 수주문학상 수상시집 『환한 봄날의 장례식』(2006년 우수도서 선정)시조집『천개의 귀』-----------------------...
바닷가 돌 틈새 갯고동 한 마리가 등짐이 무겁다.매일 새벽별을 보며 출근하는 남편의 등짝 같다썰물과 밀물이 드나들 때마다 어두운 바위틈에달라붙어 소통이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내가 다가가 툭, 치자 비좁은 돌 틈새로 몸을 움츠리며납작 엎드려 낮은 자세로 바라본다.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조직과 경쟁 속에서 수 십 번의 일탈을 꿈꾸며 더러는 납작 엎드려 숨죽였을 것이다유속의 속도에 따라 흘러왔을 시간들이등짝 속에서 간기에 절여가며 부르텄을 것이다소통과 부재의 사이에서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나는 한 번도 그의 등짝을 쓰다듬어 주지 못했다....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불임의 女子, 내 길고긴 여정의모퉁이에서 때묻은 발목 잡고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내 女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